After every candle melts










… 유령도 괴물도, 그리고 인간도 편히 쉰다
콘노 유키
괴담을 읽고 나서, 잠을 자다가 가위눌렸다. 내가 읽은 괴담은 이런 내용이었다. 어느 폐가를 방문했는데, 거기에 한 인물이 보였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그의 얼굴은 멀리서나마 창백해 보였는데,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잠에 들기 전에 나는 혹여나… 하는 망상을 펼쳤다. 그러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지만, 누가 옆에서 계속 돌아다닌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이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낮에도 그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환영일지도 모른다. 환영의 환영을 보는 일만큼 이상한 것도 없지만, 무의식 중에 본 유령의 모습이 점점 내 의식 안에서 윤곽을 띠어 갔다. 내 망상이 하나의 의식(ritual)처럼 유령을 호출한 것일까? 고민에 빠진 나는 주문을 외워 유령을 퇴치하는 의식을 치렀다. … 여기까지, 한 인간의 경험담이 적혀 있다. 유령은 떠돌아다닌다.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인간 앞에 나타나 해를 끼치거나 매혹시켜 심연에 빠지게 만든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유령이라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까? 인간의 유령 극복기가 유령과의 조우만큼이나 비과학적임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원인인데도 유령이라 확신하는 걸 보고 어이없어할지도 모른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소설 <나사의 회전>(1898)을 읽은 독자—유령도 당연히 포함된다—는 유령 때문에 머리가 아픈 인간의 모습을 보고 머리에서 나사가 빠지면서 나온 망상과, 나사를 다시 조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성적 판단의 이중 결합이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야기 속에서 유령이나 괴물은 물리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퇴치의 방법을 알게 된 인간은 의식(ritual)을 통해서 불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존재의 힘을 손안에 넣는다. 고대 설화에 나오는 용은 인간에게 초월적인 힘을 주는 존재이지만, 오늘날 홍보물이나 패션에 등장할 때, 어떤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동원된다. 이처럼 유령과 괴물은 인간 앞에서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로 그려질 때마다 어떤 유용성이 (무)의식 중에 상정된다.
송지원의 개인전 《양초가 꺼진 후에》의 무대는 양초가 꺼진 후, 즉 인간이 유령을 소환하거나 물리치려고 하는 의식(ritual)이 끝난 후의 세계를 유령과 괴물의 시선으로 상상한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작품 <늘벌레>를 만난다. 전시장에 열린 <포털>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잠깐, 유령에게 ‘발’이란 있던가? 어쨌든—을 따라간다. 마치 요괴의 행렬에 합류하듯이 말이다. 손이 여러 개 겹친, 소용돌이 모양의 <포털>은 또 다른 세계로 우리 인간을 초대한다—시간이 멈춘다. 그곳은 늘 바쁘게, 인간이 사는 세계로 소환된 유령과 괴물들의 안식처이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주문도 격조를 잃는다. 벽면에 보이는 작품은 <Sleepy Drawing>(2024)이다. 캔들 왁스를 녹여 만든 이 작업은 변형된 주문(call sign)을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격조는 잠꼬대처럼, 아니면 유령이 듣는 자장가처럼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인간도 잠에 빠지고, 유령과 괴물들도 이곳에서 모두 편히 쉰다.
전시장 바닥에는 괴물들이 봉인된 물건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 세라믹 작업 <나도 내 집이 좋아!>(2024)는 인간이 소환하기 전인, 지옥처럼 다른 세계에서 나가지 않는 유령과 괴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Big Footy>(2023)나 <Moss, Spider, Moth>(2023)와 같은 오브제 작업도 자세히 보면 편히 쉬는 괴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지난 시기의 괴물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을 떠나 쉬고 있던 것이다. <유령은 어떻게 나이들지 않을까>(2024)는 인간이 상상하는 또 다른 세계를 유령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보고 상상해 본 작업이다. 유령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내고 이해할까? 작은 책으로 엮은 6페이지의 짧은 이야기에서 유령은 블랙홀을 만난다. 포털만큼 비과학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의 블랙홀 또한 존재가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고 한다. 괴물과 유령의 발걸음이 멈춘다면, 그것은 공간을 넘나드는 감각과 시간이 멈춘 감각이 이중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지 않은,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이들은 책을 통해서 본인의 정체를 알아가게 된다.
양초가 꺼진 후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 보자. 그때 비로소 우리는 유령을 유령으로 만나는 것이 아닐까. 송지원의 《양초가 꺼진 후에》에서 우리—인간의 발걸음은 망상과 이성적 판단을 멈추고 상상으로 향한다. 꺼진 후의 어둠에 유령과 괴물이 쉴 수 있도록, 우리는 상상한다. 설령 멈춘 상태에 있고, 서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유령이 함께 있을 수 있다. 다시 <포털>을 지나,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편히 쉬는 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잠시 머물던 세계를 떠난다. 유령과 괴물들에게 ‘안녕’을 고하며—잘 있으라는 한마디와, 작별 인사로.







